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파르타식 교육 (문단 편집) == 비판 == 아기의 신체를 검사하고 미달하면 죽이는 부분부터 비과학적인데, 어릴 때 체중이 덜 나가거나 키가 작더라도 성장하며 평균보다 커지는 예는 흔하다. 오늘날의 프로 운동선수들도 유년기까진 또래보다 작고 약했다는 회고를 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최홍만]], [[김광현]]도 [[장신]]이지만 2차 성징이 오기 전에는 오히려 체구가 작은 편이었다. 되려 그 작은 신체에 적응해서 기술과 플레이 스타일을 확립해가다 갑자기 훅 커버리면서 신체 밸런스가 망가져 고생한 선수들도 많을 정도. [[훈련]] 과정은 그야말로 [[똥군기]]의 극치였고, 아이들의 생명이나 정신 건강 따위는 쥐꼬리만큼도 고려하지 않은 가혹한 훈련 때문에 죽거나 [[장애인]]이 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일부는 살아남았지만, 그렇게 훈련을 못 견디는 아이들을 버려가면서 평생 싸우는 것만 배운 소수의 엘리트 전사들로는 [[도시국가]] 주변을 정복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리스]] 전체의 패권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스파르타 군대가 강력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플라톤]]이나 [[크세노폰]] 같은 학자들은 무자비한 가혹행위를 통해 양성된 전사 개개인의 전투력과 근성이 그야말로 일당백이었다고 '''착각했지만,''' 정작 스파르타 군대는 그렇게 압도적으로 잘 싸웠던 군대가 아니었다. 분명 수십 년 동안 훈련받고 중무장을 갖췄으니 헤일로타이 저항세력이나 중소 폴리스의 군대보다는 당연히 잘 싸웠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승리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보면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서로 여러 번 승패를 주고받았으며, 심지어 그 이긴 것마저 페르시아의 도움을 받아가며 이긴거다. 이후로도 다른 폴리스의 군대보다 압도적으로 잘 싸웠다는 기록은 찾기 어렵다. 결정적으로 [[레욱트라 전투]]에서는 6,000명의 테베 동맹군에게 2배가 넘는 군대로 맞섰음에도 전멸하여 30년의 짧은 전성기의 종지부를 찍는다. 결국 훨씬 짧은 훈련과 인간적인 생활로도 스파르타와 맞먹는 군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고, 스파르타의 비인간적인 훈련이 얼마나 심각한 낭비인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때문에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파르타를 엄청나게 비판한다.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은 스파르티아테스들은 아고게로 인해 초래된 폐쇄성과 인력 소모로 숫자가 갈수록 줄어갔다. 결국 소수의 스파르티아테스들이 다수의 페리오이코이들과 소수의 헤일로타이, 그리고 동맹군들을 지휘하는 체계가 되었다. 스파르티아테스들은 당대에도 무용으로 이름 높았고, 레욱트라에서도 소수의 우익 스파르티아테스가 다수의 좌익 테베군에 둘러싸였을 때도 왕이 전사하기 전까지는 스파르티아테스들이 우세했음을 크세노폰은 암시한다. 그러나 사회 구조를 박살 낼 정도로 과투자 한 스파르티아테스가 신성부대 같은 다른 폴리스의 일반적인 정예병들보다 월등히 강했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현대에 와서도 훈련이 잘 된 군대의 가치는 매우 높고, 스파르타가 추구했던 병사 개개인의 전투력도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전술 훈련을 통해 실전에서 어떻게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하는지 아는 것, 그리고 병과 간 적절한 조합이 그보다 몇 배는 더 중요하다. 뛰어난 참모장과 더불어 병사들 간의 호흡이 잘 맞아 떨어져서 여러 번의 어려운 전투에서 승리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게다가 스파르타의 훈련이 일대일 전투에서 유의미한 스펙 상승을 불러왔냐면 그것도 '''아니다.''' 오랫동안 고문에 가까운 가혹행위를 참아왔으니 고통을 더 잘 참을 수는 있었지만, 스파르타 군인들은 사실상 인격이 말살된 인형에 가까웠다. 막말로 내구도가 오르는 것도 아니고 사람인 이상 한 번에 급소를 찔리거나 팔다리가 날아가는 중상을 입으면 이들도 무력화되는 것은 똑같았다. 스파르타군이 생각보다 다른 폴리스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한 것은 '''팔랑크스 방식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 크다. 그리스 세계에서 전투라 함은 보통 팔랑크스끼리 맞붙는 전투를 의미하고 [[호플리테스]]들이 한데 모여 엄중히 전열을 유지하다가 [[펠타스트]]나 기병들이 끼어들어 적 진형에 균열을 발생시키고 그 틈으로 호플리테스들이 밀어붙여 붕괴시키는 것이 팔랑크스 싸움의 기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개인의 싸움실력? 전투력? 의미없다. 어차피 호플리타이는 투구, 방패, 정강이보호대로 중무장하므로 진형만 제대로 갖추면 제 아무리 스파르티아테스라도 빈틈을 찾기란 쉽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진형 유지 능력이 핵심인 팔랑크스 싸움에서 호플리테스 개개인의 능력은 별로 싸움에 큰 변수로 작용하기 힘들다. 따라서 일년에 몇주일 훈련받은 군대와 평생 훈련받은 스파르타의 스파르티아테스도 팔랑크스로 맞부딪히면 전투력이 비슷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 과도한 기동까지 강요시키면 오히려 안그래도 머릿수에서 밀리는 스파르티아테스가 더욱 불리해질 수 밖에 없는 것. 애초에 팔랑크스 방식 자체가 '''고급 장비를 갖출 여력은 되지만 훈련을 길게 받을 여유는 없는 중산층 시민병'''에 최적화된 전술이기 때문에 굳이 몆십년씩 훈련받을 필요가 없는 방식이었던 것인데, 스파르타는 이를 완전히 간과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훈련한다고 해서 개인이 팔랑크스를 깨부수고 전투에 균열을 낼만한 무용을 갖추지도 못했다. 이는 테베가 스파르타의 팔랑크스를 전술적으로 완파한 레욱트라 전투에서 증명되었다. 스파르타식 훈련이 빛을 발하려면 그다지 많지 않은 인원이 뒤엉켜 싸우는 난전 형태의 전투가 되었어야 한다. [[스파르타]]의 [[시민]]들 가운데에서 아고게를 면제받을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이들은 바로 [[왕]]의 아들들, 그것도 서열이 매우 높은 왕자들 뿐이었다. 스파르타 왕의 아들, 특히 후계자가 될 남자아이들이 행여라도 아고게의 혹독함을 견뎌내지 못하게 될 때에 닥쳐올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그래서 왕위를 계승할 확률이 높은 왕의 아들들은 아고게를 거치지 않고 따로 군사훈련과 교육을 받았다.]] 다만 왕위 계승 순위가 떨어지는 왕자들은 아고게를 수행했다. [[테르모필레 전투]]의 활약으로 유명한 [[레오니다스 1세]]가 대표적이다.[* 레오니다스는 비록 왕자였으나 형이 둘이나 있었기 때문에 아고게를 거쳐야 했다. 두 형이 모두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죽는 바람에(큰형은 [[고르고 왕비|딸]]을 하나 남겼으며 레오니다스는 왕위 계승을 위해 이 조카와 결혼한다) 예기치 않게 왕위를 계승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는 반대로 말하자면 스파르타인 본인들도 아고게가 '''보통 사람들이 평범하게 소화할 수 없는 미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소리다. 이런 스파르타식 교육을 정면으로 비웃을 수 있는 사례가 바로 스파르타 역사상 최고의 군주로 평가받는 [[아게실라오스 2세]]다. 그는 선천적으로 왜소한 체구와 [[절름발이]] 장애를 안고 태어났지만, 시민 계급의 수가 감소하던 시기에 태어나서 그랬는지 살해당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성장한 그는 아고게를 완전히, 그것도 수석으로 수료하고 왕위에 올라서는 정복왕으로 활동하며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원정을 떠날 정도로 강건했다.[* 기원전 4세기 사람이 무려 84세까지 장수했다!] 원칙대로라면 태어나자마자 절벽에서 던져졌어야 할 아기가 아고게 최우수 졸업생이 되고 정복 군주가 되고 스파르타 역사상 제일 뛰어난 군주라는 평가까지 받게 된 것이다. 아고게가 얼마나 쓸데없는 짓이었는지 알 수 있는 사례이다.[* 물론 아게실라오스 2세 시기의 스파르타는 재위 초창기에 전성기를 걷다가 중반에 전성기가 흔들리며 말엽에 쇠퇴하였지만 스파르타의 쇠퇴에는 그 자신의 책임보다는 스파르타의 체제에 문제가 더 많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